2022 현상의 현상 전시평론
《현상의 현상》 참여작가 이지양, 유화수, 인세인박, 송희정에 대한 비평
: 잔상, 일지, 권한, 살갗
Ⅰ. 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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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가 본 것은 어느 짐승의 작은 새끼였다. 이제 막 걸음을 뗀 발로 어미 뒤를 쫓아다니다 달려오는 차에 치명적인 내상을 입었을 것이었다. 내가 탄 자동차는 그대로 도로를 질주해 갔지만, 좀 전에 목격한 새끼 노루의 형상은 그 뒤로도 한참 눈앞에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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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객체의 외양에 나타나는 상이라는 뜻이다. 상은 특정한 이미지를 만든다. 구름의 색과 움직임 모양을 보고 우리는 태풍이 곧 온다든가 하는, 현상을 예측한다. 녹조가 자욱한 수조의 수질을 보고 그 속의 생명체에 닥칠 현상을 가늠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현상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미지를 통해 인간에게 감지된다. 이미지를 경유하지 않는 현상은 인간에게 덜 자극적이다. 관념이 아닌 실재로서 무엇을 설명해야 한다고 할 때, 우리는 이미지를 도판으로 제시하거나 눈앞에 현현하는 것처럼 상황을 ‘그림처럼’ 묘사하며 그것을 재현한다.
시간이 지나고도 눈앞에 놓인 것처럼 선명했던, 그 새끼 짐승의 모습은 내게 어떤 현상을 주지시키려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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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양의 < 반짝반짝 작은 별: 애도없는 작은 죽음 >(2015)은 동요 ‘작은 별’에 맞춰 상영되는 단채널 영상이다. 밤하늘을 촬영한 듯 전부 어둠으로 채워진 화면에서 ‘틱-틱’ 소리와 함께 작은 스파크가 발생한다. 수시로 빛을 내며 마치 별처럼 존재감을 발하지만 전기 자극의 물리적이고 산발적인 파흔이 낭만으로 향할 법한 감성의 길목을 차단한다. 전기 모기채에 모기가 타 죽는 장면을 기록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감성은 더 파괴된다. 시종 무심하게 노래를 부르는 여인의 음성 BGM은 살짝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이지양은 전시 《현상의 현상》(2022, 복합문화공간 어가길)에 참여하며 < 반짝반짝 작은 별: 애도없는 작은 죽음 >을 상영하고 < 애도없는 작은 죽음 >(2015-2022)으로 이름 붙인 사진 연작을 천에 새로 프린트해 걸었다. 표준 두께와 규격을 갖춘 인화지가 아닌, 공간 내에서 약간의 유동성을 띠며 수직 방향으로 늘어진 긴 천 위에 작가가 촬영한 생명체 연작이 하나씩 담겨 있다. 그것은 날파리, 꿀벌, 새, 애벌레, 새끼 노루 같은 것인데 모두 정지된 피사체로 죽음을 드리우고 있다는 데서 일체감을 공유한다. 그러나 그 같은 죽음은 그들 주위를 감싼 배경의 밝은 색채와 장식적인 패턴 속에서 관심을 주시해야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카메라에 적나라하게 찍히기보다 간헐적인 빛과 소리로 생멸의 운명을 드러냈던 모기처럼.
이지양은 하찮고 별 볼일 없다고 여겨지는, 그러나 생명을 지닌 존재에 관한 관심과 그들의 소리 소문 없는 죽음에 대하여 연민과 슬픔, 고통의 책임을 묻는다. 그러나 그 같은 이미지 앞에서 작가의 질문은 직설적인 한편, 답을 단정하며 좇지는 않는다. 끔찍한 외상과 부패된 오염이 아닌, 다듬어진 이미지와 연극성 같은 우회로로 질문의 고리를 더 연장해간다.
물망초 형상의 모티브가 연속체로 드러나는 (2010-2022)은 버려진 인형을 수집한 작가에 의해 과거 인형에서 현재 알록달록한 천으로 변형된 작업이다. 낱개의 조각이지만 패치워크로 한 장이 된 이것 역시 주시해서 본다면 우리가 잘 아는, 보기에 껄끄럽지 않은, 인식에 고정된, 소위 원형이자 살아있는, 스테레오타입에 가까운 것을 지각하게 된다. 동물을 모방한, 귀여운 캐릭터 인형 말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꽃의 형상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 낱낱이 오려지고 분해됐다 연결된 상태다. 꽃술이 위치할 중심 부분에는 인형 눈깔이 섬뜩하게 박혀있다. 작가는 양극단 사이를 왕래하며 관람객의 지각 판정을 혼란으로 막고 거푸 튕겨내왔다. 도달했던 지각적 판단의 길을 되돌아가게 하는 작가의 설득 가까운 기술은 무의식 속 잔상으로 잔존했던 트라우마적 형상을 여기 눈앞의 현상으로 보이게 하는 데에도 일조한다. 수십 개의 꽃, 수십 개의 비인간종의 눈이 그들 자신과 마주친 인간의 망막에 있던 ‘본 것’을 투영하여 회생시킨다. 그 이미지는 말하고 있다.
“나를 잊지 말아요.”
Ⅱ.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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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선적인 움직임은 아니다. 그것은 매우 오랜 시간에 걸쳐 반복적인 수행으로 도달한 상태에 가깝다. 표준은 아니지만, 습관으로 굳어진 관행 같은 것. ‘효율화.’ 혹자는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 그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들 미명의 현상은 확률 게임처럼 이따금의 배신을 일삼는다. 능률을 위장한 관성이 지금껏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뜻을 증언하기라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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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수의 < 건설적인 드로잉 >(2022)은 건설 현장에서 채집된 오브제로 이루어져 있다. 서로 다른 물성과 서로 다른 부피, 형태를 띠고 있는 그들은 ‘ㄷ’자형 좌대를 대체한 은색 비계 위에 일정한 횡 간격을 유지하며 자리 잡고 있다. 어떤 것은 정지된 사물의 조합체고, 어느 것은 그에 기계적 동력을 더한 키네틱 조각이다. 움직이는 것들도 개별적인 속도와 방향성이 다 다르다. 빛을 내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원래의 용도를 유추할 수 있는 부품이 있는가 하면, 어디에 쓰였던 것인지 추리 불가한 것도 있다. 유화수는 이들 오브제를 그의 작업실이 있는 경기도 파주와 전시가 예정된 포천 지역을 여러 날 오가며 수집했다. 조합된 오브제 개수 80점은 그가 매일 출퇴근하듯 하루 한 점씩 설계하고 완성한 노동의 결과를 수치적으로 드러내는 징표이기도 하다. 미술계 노동자, 장애 노동자, 운송 노동자, 산업 노동자, 이주 노동자 등 노동의 이슈를 설치·영상 등의 매체로 다루며, 사회가 상대적으로 배제하고 소외시킨 영역을 실증하는 작업을 해온 그였다. 하루 한 점의 드로잉은 ‘근면한 작가 생활은 무엇인가’를 자문한 그 스스로 세운 규칙이자 몸에 밴 관행이다.
작가의 건설적인 노동의 결과, < 건설적인 드로잉 >은 하나의 설치 작업으로 완성도를 보임과 동시에 각자 분리되는 80점의 조각으로서 개별 서사와 조형성을 성취하였다. 이들은 전시 후 작가의 취사에 의해 선택적으로 폐기 혹은 보존될 운명을 앞두고 전시대에 오른다. 또 이들은 사용자에 의해 모집-발탁-기용-계약 연장 혹은 종료되는 노동시장 인력을 의인화한 사물로 건설 현장의 임시 발판 구조물 위 다수 중의 하나로 놓인다. 작가는 각각에게 이름을 부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사물 조각은 군집된 개별 형상으로서 자기 역할을 다할 뿐이다. 나는 그들 형체의 운동성을 본다. 원래의 장소에서 이관된 이주의 역사와, 생을 다한 폐기물 혹은 전체에서 탈락한 부품의 탈·부착된 노면과, 축의 위계 없이 회전하기를 반복하는 물질의 외양과, 정지된 물성 사이 그리고 발광하는 물질 사이 비루하지만 발동하는 박자 감각을 본다. 개념미술격 오브제, 설치미술의 스케일을 타고 넘어 일상 조각과 예술 매체적 조각을 거친 드로잉으로 순환한 미술가 일일의 여정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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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유화수는 개인전 《잡초의 자리》(2021, 문화비축기지)를 열며, 인간의 노동을 대체해가는 기술의 속성을 탐구했다. 일부 유지되면서 일부는 변화해가는 사회 현상의 유동에 맞춰 ‘근면한 작가의 기술은 무엇인가’를 자문한 듯 스마트팜 기술을 적용한 새 장비를 만들었다. 그 안에 그는 잡초를 넣어 키웠다. 아무것도 아니던 것을 새롭게 조명하려던 듯이. 나는 그것이 예술이 되는 현상을 적기로 했다. 퇴고하지 않은 일지의 형식으로.
Ⅲ. 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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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eology is blood-thirsty"
붉은 네온 빛의 파장으로 전달되는 이 간명한 문장은 전시장에 모종의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다. 전시 《현상의 현상》이 열리는 포천의 낡은 건물 안, 그중에서도 가장 안쪽 깊숙한 벽면 한 쪽에 작가 인세인박은 네온 사인의 작업 < 이데올로기는 피를 먹고 자란다 >(2022)를 걸어두었다. 나는 선홍빛으로 발광하는 이 의미심장한 문구의 작업을 보기 직전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 회상한다. 과거 염색공장으로 쓰였다던 단층짜리 회색 건물의 초입은 높이감 있는 조립식 판넬 문으로 되어있었고, 전시장을 지키던 작가들은 이를 열었다가 닫았다가 하면서 내부로 드는 광량을 커튼처럼 조절하고 있었다. 포천에 얼마 없는 문화공간 중 하나로 이곳(복합문화공간 어가길)이 곧 기능할 거 같다는 전언도 더했다. 인근에는 잘 꾸며진 베이커리 카페가 도시재생의 지표로 성행하고 있었고 그 외 대부분의 풍경은 차량 도로였다.
인세인박은 인터넷 통신망의 방화벽을 물성화한 가변설치작 < 방화벽 >(2022)도 전시했는데, 붉은색 벽돌에 음각으로 새긴 접근 금지의 문장 “권한이 없습니다(You don't have permission)”가 자신의 출처를 쉽게 드러내고 있었다. 앞서 네온의 활자까지 더해 작가가 채택한 텍스트 이미지 작업은 그가 오랫동안 일관된 태도로 보여줬던 데카당스의 무드를 추가하는 것이었다. 특유의 반항과 유머가 버무려진 중도의 무게감도 예외는 아니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 방화벽 >은 실제 벽처럼 기립해 세워져야 했는데, 그러기에는 기술적 한계를 느껴 대신 바닥에 누운 상태로 전시되었다. 바닥에 평탄하게 깔려있는 벽.
또 하나의 출품작 < 파편화 >(2022)에서도 작가의 기호학적 관심이 확인되었다. < 파편화 >는 포천시 상징물을 점, 선, 면의 기본 조형 단위로 해체한 디지털 영상과 이를 기반으로 그린 세 점의 회화 연작이다. 조선기 포천에 살았다던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이 손잡고 웃고 있는 벡터 캐릭터 이미지를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분할하고, 미술의 전통 매체이자 작가성이 발휘되는 회화 장르로 탈환시켰다. 매끄럽고 평평한 화면의 안료 처리로 인해 인쇄된 그림이 아닌가 잠깐 의심하기는 했지만,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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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세인박이 거대 권력과 그에 반하는 약자의 위치를 대비시키고, 그것을 이미지로 가시화하는 데 활용하는 해체의 전략은 기성 위계를 전복시키고 상징체계를 무너뜨리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가 만든, 일종의 작가 포트폴리오로 페이지를 더해가는 이들 현상은 지금까지의 의미로서만 충족되면 그만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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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의 현상》은 2022년 포천문화재단 문화예술 공모지원 사업 ‘포.도.당’에 지원·선정된 인세인박을 비롯한 작가 4인의 그룹전이다. 참여자 50%가 포천 지역 거주민이어야 한다는 공모의 요건에 딱 맞는 구성이었다. 전시기획을 주도한 인세인박은 사업의 취지에 따라 포천의 지역성과 관련된 현상을 예술적 시선으로 풀어내려고 했다. 그가 쓴 전시 서문에도 나타나있는 이들 내용은 말하자면 계획적인 사업이고 작업이다. 그러나 의도치 않은 해프닝과 오역이 전무할 수는 없다. 타 도시에서 포천으로 이주해와, 신생 문화재단의 기금 경쟁을 통과하며, 예술적 기반이 희소한 곳에서 생업을 모색해 나가야 하는 작가의 입장이 형이하학의 실재로서 작품의 기호학적 상징이 아닌 현장의 물리적 조건과 즉물적 실체감으로 배어 나오고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2020년 인세인박의 개인전 명제처럼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를 발언하는 소위 ‘밈(meme)’과 같은 동시대 현상과 평평한 이미지의 세계 이면의 실증이 블랙코미디처럼 뒤섞인 모습은 이번 전시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인세인박이 일군 풍자의 전술을 예술 바깥의 현상과 관계시키는 일에 기여하려고 한다. 그것이 작가가 서브 텍스트로 취해온 행동주의보다 적나라한, 그래서 작금에 필요한 예술의 몫이 될 거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더 인세인(insane)할 “권한이 있다.”
Ⅳ. 살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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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본 것은 본 것일까? 눈을 감고 있었는데 본 것처럼 지각된, 귀로도 들리고, 피부에 닿은 것처럼 감각된 그들의 기원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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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찾아가자 1만2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철 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산.
이름도 아름다워 금강이라네.
금강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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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세대에게 남북전쟁은 꿈과 실재 사이 어딘가의 위치에 내재된 경험이다. 동요 ‘금강산’을 뜻도 모르면서 외워 부르고 반공 포스터 그리기 과제를 기계적으로 해내던 유년기의 멋모름처럼, 놀이와 의무교육으로 전쟁을 먼저 접하고 학습된 생활로 받아들인 국가주의의 면면이 그랬다. 특히 냉전이 붕괴된 1990년 전후 태어난 송희정 작가의 경우같이 지금의 MZ세대에게 분단의 표식은 주입된 기억과 일상의 어렴풋한 감각 가운데를 여러 번 타고 넘어야 선명하게 입체화시킬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송희정 작가가 어린 시절 즐겨 했다던 놀이를 회상하며 촬영한 신작 < 고무줄놀이 >(2022)와 동명의 가변설치물은 철조망 형태의 까만 고무줄과 배경음으로 흘러나오는 ‘금강산’의 가사 때문에, ‘놀이’아닌 ‘의식’으로서 퍼포머의 동작을 응시하게 한다. 작가는 포천의 한 초등학교 운동장 놀이터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는 자기 자신의 신체를 촬영했다. 언급했듯 영상 속 고무줄은 철조망의 날카로움을 빼다 옮긴 듯, 삐죽삐죽한 가시를 달고 이 자유로운 놀이의 기구로 유용되며 살갗을 스치고 있다. 영상이 투사되는 전시장 벽면과 관람객 중간에는 영상 속에 등장한 것과 같은 고무 철조망이 뚫린 공간을 가로막고 있다. 바라보는 대상과 보는 주체 사이 존재하는 비가시적 이미지 창 자리에 놓인 그것은 분단국가의 가운데, 비무장지대(DMZ)를 은유하고 있다. ‘만져도 된다’는 작가의 말에 철조망에 손을 갖다 대면 물질의 부드러운 탄성이 느껴지고, 이어 어린 시절 가지고 놀았던 고무줄의 촉감이 새록새록 의식에 겹쳐진다. 원래는 하나였던-분할된 두 곳의 영역을 타고 넘는 퍼포머의 의식과 무의식에 동화되는 순간이다.
작가는 전작 (2022)에서 두 퍼포머의 손이 서로 닿을 듯 말 듯 가깝게 마주하며 교감하는 영상을 선보인 바 있다. 작가노트에 의하면 “피부 바깥의 현실은 안쪽 세계를 너무나 쉽게 압도하기에 최소한의 간격을 유지하여 온전한 내적 에너지의 연결을 유도한다”고 쓰고 있다. 작가 송희정이 분리된 두 세계의 긴장과 두 차원의 신체 감각이 스며든 조형 매체 작업으로 앞으로의 미술을 내파하게 될 것을 예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 고무줄놀이 >는 그에 대한 하나의 현상 증거다.
-오정은 2022. 10